'Future'라고하면 망막할 수도있다.
또한 걱정이 될수도 있다.
불투명하기에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도있다.
나는 이런 미래를 과거를 통하여 미래를 보고싶다.
어렸을 때의 시절은 가난했던 것 밖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와중에는 대학, 대학원까지 음악 신학까지 공부하고 목사안수 받는 시간까지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다.
종교음악을 공부하면서 교회음악인으로써 큰 꿈을 가졌다. 그러면서 문화사역자의 눈을 뜨게한 분은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들어갈 시절
부르베이커 교수와 미첼교수의 도움이었다. 미국 순회 연주회를 통하여 미국을 보게하며 미국교회를 보게한 것이다.
그것이 나로하여금 미국의 꿈을 심게한 결정적인 동기였다.
1995년도 미국에 이민오기전까지 나는 찬양사역자로, 합창단 지휘자로, 문화사역자로 정말 잘나갔던 사람이다.
거기에 물질의 풍성함 까지 채워주신 하나님이셨다.
거기에 세계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찬양 사역으로 선교를 경험하게 하셨다. 가장 많이간 나라는 말레이지아 쿠알라룸프르 대 도시 부터 보르네오 정글까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브르나이, 일본, 캐나다 미국 정말 국제적인 집회로 한해한해를 준비하며 황홀하고 기쁘게 사역하였다.
그러던 1995년 7월 캐나다 밴쿠버부터 토론토까지 횡단 집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한국 사역을 다 사표내고 그해 9월 뉴욕으로 초청받아 오게되었다. 무엇에 홀린듯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모세가 어느날 시내산에서 갑자기 딸기나무 사건을 경험했듯이 한 순간 미국을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이민교회(후러싱제[일교회)에서 찬양사역자로 부목사로 3년을 사역하였다. 이 때도 하나님 앞에 한점 부끄러움 없이 최선을 다하여 사역하였다.
그리고 1998년 무엇에 홀렸는지 그렇게도 한국에서 단독목회를 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무시하고 내 사명이 아니라고했던 단독 목회를 뉴욕 한복판에서 시작한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정말 용감했다. 누가 자주 물어봅니다. 어떤 소명을 받았고, 어떻게 준비하여서 개척을 시작했냐고.....그때마다 솔찍히 대답합니다. "엉겁결에 무엇엔가 홀린듯이"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창립 11주년에 지금의 성전을 구입하여 입당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이 시점에서 'Future'란 내 계획은 없다 무엇엔가 홀려 그것에 강하게 끌리거나 아니면 보냄을 받든가
그래서 나는 미래에 대하여 궁금하며 기대된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그 다음길은 어떤 길이 예비되어있는가?
내의지가 전혀없었다. 어떤 하나의 선택도
찬양사역의 전도사 시절도, 부목사의 시절도, 그리고 지금의 단독 목회도.......어느것 하나 필요 없었던 부분이 없다.
오늘의 내가 있게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시기였다.
'있어야할 시기에 있을 곳에서 해야할 일을 했다고 말할 수있다.'하나님의 섭리다.
그러므로 'Future'에 대하여는 결코 두려움이나 염려는 없다 오직 궁금할 뿐이다.
그리고 기대가 된다.
과거에서부터 오늘의 여기 뉴욕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여호와이레로 이끄실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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