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비하면
(3월31일 목회편지)
부활의 기적과 축복이 가정에 넘치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가끔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옛날에 비하며” 인간은 언제나 비교하면서 삽니다. 비교 우리의 인생에서 꼭 있어야하는 필수적인 단어입니다. 비교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비교’라는 단어는 매우 유용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잘못 사용하면 비교의식 속에서 인생이 낙담과 좌절로가는 근본이 되기도 합니다.
비교 없이는 인생은 성숙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매일 매일 비교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교는 해서는 안됩니다. 인생과 인생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교 평가할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독특한 존재입니다. 서로의 다른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르게 살아왔고, 서로의 비젼과 사명 그리고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학력이라는 것이나 돈이라는 것 또는 외모주의로 평가를 하는 어리석은 세상입니다. 아니 그런 평가에 평가를 받고 있는 어리석은 인생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할 비교는 있습니다.
“내가 과연 꾸준히 성숙하고 있는가?”이것은 내 자신의 비교입니다. 과거와 오늘의 비교며 오늘과 내일의 비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성숙을 측량할 수 있는 지표는 비교로합니다. 그런데 이 비교를 철저하게 정확히 하려고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말은 정확한 비교평가의 해답을 얻지 못한다는 결론입니다. 그릇된 오답은 오늘의 나의 해답이 되지 못하고 진리가되
지 못합니다. 이 사실은 엄청난 삶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나는 나의 과거를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압니다. 그리고 오늘의 나를 내가 가장 잘 압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가끔합니다. “옛날에는” 그 다음에는 어떤 해답을 만들어 내십니까? 지금 확실한 것은 옛날보다 잘산다는 사실입니다. 편리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넉넉하다는 것입니다. 문화와 문명이 발전했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옛날보다는 나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옛날 같지가 않습니다. 예배가 많이 소홀해졌습니다. 기도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봉사가 그렇게 뜨겁지 않습니다.
이번 한 주간 고난주일을 대하며 정말 옛날 같지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고난주간에는 새벽기도가 주일 대예배 수준이었습니다. 고난주간 금식하면서 부활주일에는 여의도광장까지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새벽 연합예배를 드리러 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는 비교하려고하지 않습니다. 비교는 하는데 해답을 잘못 내리고 있습니다. ‘바쁘니까’ ‘힘들어서’ .....정말 그것이 해답일까요 혹시 그것을 해답으로 알고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은 그릇된 비교평가 해답입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입니다. 정확한 해답을 찾으십시오
내가 너무나 육에 속했던 것입니다. 영을 소홀히 했던 것입니다. 영이 너무나 나약해졌습니다. 영이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육은 세상맛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육은 더 강해졌습니다. 육은 육을 더 충족시켜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영과 육의 갈등이었으나 이제는 육의 편에서 육을 응원합니다. “육이 피곤해‘ ’육이 바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어야합니다. 영적인 것 만큼은 반드시 옛날보다는 나아야합니다. 반드시 옛날보다는 성숙해야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하며 영이 잘되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네가 처음 사랑과 처음 열심을 회복하라”고했습니다. 비교하십시오 철저하게 비교하십시오 정확히 비교하십시오 서서히 무기력해져갈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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